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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륜(이방원의 책사)

하륜(이방원의 책사)


하륜은 1347년 고려시대 순흥부사를 지내던 하윤린의 아들이다. 인품은 중후, 침착, 대범하였다.


저서로는 문집 『호정집(浩亭集)』 약간권이 있다. 태종의 묘정(廟庭)에 봉안되었다. 

그를 한나라의 장자방(張子房: 張良), 송나라의 치규(稚圭)라 일컫기도 한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365년 문관에 급제, 감찰규정이 되었지만 신돈과의 불화로 파직된다. 하지만 다시 복직하여 고공좌랑에 오르게 되었다.

밀직사첨서사를 거쳐, 1388년 최영장군의 요동정벌을 반대하다가 양주로 유배를 간 바 있다.

조선 개국 이후에는 1393년 경기도 도관찰사가 되어 무악 천도를 주장하였으나 끝내 실현되지 못했고 이듬해 중추원첨서사에 전보되었다.

1394년 제1차 왕자의 난 때 충청도 도관찰사로서 이방원을 도와 공을 세웠다. 이에 정당문학에 올라 정사공신 1등에 책록되고 진산군에 봉해졌다.

1400년 제 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을 때에도 이방원을 도왔고, 두터운 신임을 얻게 되면서 권력의 실세로 군림하게 된다.

그해 명나라 태조의 국상에 진위 겸 진향사로 가서 정종의 왕위계승을 승인받고 귀국하였으며

문하부참산사에, 다시 의흥삼군부 판사를 거쳐 우정승으로 진산백에 진봉되었다. 


그해 태종이 즉위하면서 좌명공신 1등에 책록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정치제도를 개편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6조직계제를 도입해 각판서들의 권한을 강화했고, 왕에게 업무를 보고하게 만듦으로써 재상의 권한을 축소하였다.

저화를 발행해 재정의 확충을 도모하였고 신문고를 설치함으로써 백성의 의견을 수렴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였다.

잠시 관직에서 물러났지만 좌정승으로 복관, 승추부판사를 겸하였다.

그해 명나라 영락제의 등극사로 가서 조선왕조의 완전인준을 표하는 고명인장을 받아오기도 했다.


한편 이첨과 함께 동국사락을 편수하였다.

1409년 의정부영사가 되어 군정을 개정한 데 이어 춘추관영사로 편찬을 지휘하고 1412년 다시 좌의정을 거쳐 1416년 70세로 치사하였다. 

진산부원군에 진봉되어 왕명으로 함길도에 있는 선왕의 능침을 순심하고 돌아오는 길에 사망하였다.



- SBS 육룡이 나르샤(21회) "하륜"



하륜은 인사 청탁을 많이 받았고, 통진 고양포(高陽浦)의 간척지 200여 섬 지기를 개인 농장으로 착복하여 대간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으나 공신이라 하여 묵인되었다. 


고려말 조선초기 문신

출생 - 고려 1347년(충목왕3년)12월 22일 ~ 사망 - 조선 1416년(태종16년)11월 6일

본관 - 진주

자 -대림 호-호정 시호-문충

저서 - 호정집 약간권

관직 - 영의정부사, 좌정승, 좌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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