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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 장군의 위화도 회군(威化島回軍)

이성계 장군의 위화도 회군(威化島回軍)

 

위화도 회군은 고려 말기(1388년), 요동정벌에 나섰던 이성계(李成桂)와 조민수(曺敏修)가 압록강 부근 위화도에서 군사를 회군시켜 개경을 함락시키고, 권력을 장악한 사건이다.


고려 말기 원나라가 몰락하면서 동아시아의 정세에 큰 변동이 일어났다. 고려 역시 이러한 국제 정세에 맞춰 국가 간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공민왕은 1369년, 1370년 두 차례 요동(遼東) 지역 동녕부(東寧府)를 공격하면서 북진 의지를 강력하게 피력했다. 명나라 역시 고려가 요동으로 진출할 것을 우려하여 1371년 요양에 요동위를 설치하는 등 고려를 압박하고, 요동지역으로의 영토 확장을 노렸다.


당시 요동을 점령하고 있던 나하추와 원나라의 잔여 세력은 고려와 우호관계를 유지함으로써 명나라를 견제하고자 했다. 한편 공민왕 사후, 우왕이 즉위하자 고려의 새로운 권력자로 떠오른 이인임은 명나라 사신 채빈의 살해사건을 계기로 원나라, 명나라 모두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여 균형을 유지하고자 했다.

 

하지만 1387년 나하추가 명나라에 항복하면서 힘의 균형은 명나라로 기울었고, 고려에도 직접적인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1388년에는 과거 원나라의 쌍성총관부가 있었던 철령 이북의 땅에 철령위를 설치하겠다는 이유로 영토 반환을 요구해왔다. 이 지역은 1356년 고려가 탈환한 이래로 화주목을 설치하면서 직접 통치하던 곳이었다.

 

당시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최영은 명나라의 무리한 요구를 군사적으로 침략하기 위해 압박하는 것이라 여기고 크게 경계하였다. 이에 명나라의 홍무(洪武) 연호 사용을 중지했고, 명나라의 침략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고자 요동정벌을 준비했다.

 

우왕은 서경에 머무르며 5만 여명의 군사를 징집하여 요동정벌군을 편성하였다. 최영을 총사령관인 팔도도통사로 삼고, 좌군 도통사에 조민수, 우군 도통사에 이성계를 임명해 출정하도록 했다. 서경을 떠난 원정군은 압록강 변의 위화도(威化島)에 도착했는데, 그곳에서 압록강의 물이 불어나 강을 건너기 어렵다며 진군을 중단한 채 14일을 머물렀다. 한편 이성계는 조민수와 회군에 관해 논의한 끝에 4불가론을 주장하며 요동 정벌을 중단하고 철군할 것을 요구하였다.

 

 

- SBS. 육룡이 나르샤 "위화도 회군(威化島回軍)"


이성계 4불가론(四不可論)

 

1.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치면 안 된다. (以小逆大)

2.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해서는 안 된다. (夏月發兵)

3. 모든 병사를 동원해 북벌을 하면 왜구의 침입을 받을 다. (擧國遠征, 倭乘其虛)

4. 무덥고, 장마철이므로 활이 망가지기 쉽고, 전염병에 걸릴 우려가 있다. (時方暑雨, 弓弩膠解, 大軍疾疫)

 


하지만 서경에 있던 우왕과 최영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고, 오직 진군하라는 명령만을 내릴 뿐이었다. 이에 이성계와 조민수는 명을 무시한 채 음력 5월 22일 회군하였다. 우왕과 최영은 크게 당황하여 서경에서 급히 개경으로 돌아와 반격을 준비하였다. 위화도에서 회군한지 9일 만에 이성계와 조민수가 이끄는 반란군은 개경 부근까지 도달했다. 2일 후에는 개경을 함락시키고 우왕과 최영을 사로잡았다.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장악한 이성계와 조민수는 우왕을 폐위시키고, 강화도로 유배 보냈다. 최영은 고봉으로 유배를 보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처형시켰다. 이어서 우왕의 아들인 창왕을 왕으로 추대했고, 조민수는 우시중, 이성계는 좌시중의 지위에 올랐다.

 

그 후 조정의 주도권을 놓고 이성계와 조민수가 대립하였으나 군사력, 정치적 기반 모두 월등했던 이성계가 승리하였다. 이성계는 조민수와 이색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던 창왕을 과거 고려의 승려였던 신돈의 후손이라 주장하면서 폐위시켰고, 공양왕을 추대하였다. 이로써 고려 조정을 완전히 장악한 이성계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朝鮮)을 건국하여 조선 1대 왕(태조)에 오르게 된다.

 

-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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