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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준경 실제역사(소드마스터, 후손, 곡산, 실존)

척준경 실제역사(소드마스터, 후손, 곡산, 실존)

 

척준경은 실존인물로, 그의 기록은 과장된 것처럼 보이지만 고려사절요와 같은 정사에 적힌 내용이다.

그가 역사적으로는 패배했음을 고려해 볼 때 굉장히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척준경은 곡산 척씨(谷山拓氏) 가문의 시조인데 현재 척씨 성이 없는 것을 고려해볼 때 그의 후손은 남아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후손들은 도중에 멸문을 당했거나 불가피한 사정이 생겨서 성을 바꾸는 식으로 자취를 감춘 것으로 보인다.

 

한편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척준경의 후손으로 가상인물 척사광을 내세워 극의 흥미을 더하고 있다.

 

 

척준경(拓俊京, ?~1144)은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 척위공(拓謂恭)의 아들로, 고려 중기의 무신, 정치인이다.

 

출신은 황해도 곡주(곡산군)로, 곡산 척씨다.

 

척준경은 숙종 즉위년인 1095년에 추밀원 별가(樞密院別駕)가 되면서 벼슬길에 올랐다. 1104(숙종 9)부터 1109년까지 윤관, 오연총 등과 함께 함경도에 침입한 여진족을 몰아내고 동북 9성을 쌓는데 기여했다. 그는 뛰어난 용맹으로 여진족을 정벌하며 많은 공을 세웠지만 이자겸과 함께 전횡을 일삼아 나라를 어지럽게 만들었다는 오점도 함께 가지고 있다.

 

11042월 동북면 병마사 임간이 정주에서 훈련되지 않은 군사를 무리하게 출정시켰다가 동여진과 싸워 크게 패하고 전사했다. 이에 정주성 또한 함락 위기에 직면하고 마는데 척준경이 적장 둘을 베어 추격해오는 적의 기세를 꺾어 퇴각하게 만들었고, 이에 남은 병사들도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척준경은 임간에게 무기와 갑옷을 입힌 말을 얻은 뒤, 홀로 여진족 기병대를 향해 돌진해 적장 1명을 베었고, 포로인 준민, 덕린을 구출한 뒤 여진족을 1명씩 쏴 죽이자 여진족 군사들이 놀라 크게 동요하였다.

 

척준경이 물러날 때 여진의 기병 100여명이 뒤를 쫓았지만 추격하는 여진족 장수 1명을 사살하고, 성벽에서 대상 인점이 또 적장 1명을 죽이자 지휘관을 잃은 여진족 군사들은 동요하여 급히 달아났다. 척준경은 이 싸움을 계기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천우위 녹사 참군사가 된다.

 

한편 숙종은 윤관으로 임간을 대신하게 하였지만 윤관 역시 여진족에게 밀려 돌아와 강화를 청하자 크게 분노하여 여진 정벌 계획을 추진하게 되었다. 숙종 사후, 즉위하게 된 예종(睿宗)110717만 대군을 편성하여 여진족을 공격하라 명하였다. 이 무렵 윤관은 척준경이 독단적인 행동을 벌인 죄를 용서해주었고, 척준경 역시 이에 보답하듯 용감히 싸워 큰 공을 세웠다.

 

1107년 고려는 여진족 정벌을 하기에 앞서 여진족 추장들에게 억류된 추장들을 풀어준다고 하여 고려 땅으로 불러들이고는 모두 참하였다. 이 제안을 믿지 않았던 일부 추장들은 천리장성 밖에 그대로 머무르고 있었는데 윤관을 따라 출정한 척준경이 김부필(김부식의 형), 최홍정과 함께 이들을 모두 잡아 죽였다. 여진족은 석성에서 완강하게 농성하였는데 척준경이 선두에 서서 여진족을 모두 무찔렀고, 이로 인해 군사들의 사기가 올라 성을 점령할 수 있었다.

 

이후에도 정예부대를 따로 편성하여 석성(石城)을 공격하라는 윤관의 명에 방패를 들고 석성의 성벽을 타고 올라가 성에 잠입해 승리를 거두었다. 이에 그치지않고 여진족이 재기할 틈을 주지 않은 채 바로 공격하여 섬멸하였다. 척준경 군이 석성에서 공방전을 벌이는 사이 윤관은 친히 좌군을 이끌고 석성을 함락시켰다. 이날 정벌군 전 부대는 여진족을 크게 격파하여 수급1만개를 획득하였고 동여진의 요을대와 휘하 3230명의 항복을 받아내는 공을 세웠다. 척준경은 석성에 잠입한 공으로 능라 30필을 하사받았다.

 

1108년에는 오연총, 윤관, 왕자지 등과 함께 별무반을 이끌고 다시 출정하였다. 윤관은 오연총과 함께 정병 8,000명을 데리고 가한촌 입구의 작은 길로 나갔는데 풀숲 사이에 매복하던 여진족 군사들이 기다렸다가 공격하여 섬멸시켰다. 이때 대부분 죽고 다만 10여 명이 남았다. 도원수 윤관과 부원수 오연총과 함께 여진족에게 포위되고, 곧 포로로 사로잡히게 되었다. 형세가 위태로워지자, 화살에 맞은 오연총이 사로잡히기 직전 급히 사자를 보내 위급함을 알렸다. 그러자 척준경이 후발대를 이끌고, 급습하여 구출하였다.

 

이 때 척준경의 아우 척준신"적진이 견고하여 좀처럼 돌파하지 못할 것 같은데 괜히 쓸데없는 죽음을 당하는 것이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라며 만류하였다. 하지만 척준경은 "너는 돌아가서 늙은 아버님을 봉양하거라! 나는 이 한 몸을 국가에 바쳤으니 의리상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답변하며 급히 정예병사 10여명을 데리고, 적진 속으로 돌격하여 여진족들이 포위를 풀고 달아나게 했다. 순식간에 적군 10여명을 죽이고 윤관을 구출한 무렵에 최홍정과 이관진이 이끄는 지원군도 함께 나타나 윤관과 오연총을 구출하였다. 무사히 영주로 돌아온 윤관은 눈물을 흘리면서 감격해하였다. 윤관은 영주성으로 돌아와 척준경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그를 양자로 삼았고, 합문지후로 승격시켰다.

 

이후 적은 2만 군사를 이끌고 영주성 남쪽으로 진군하였다. 윤관과 임언, 오연총 등은 방어에 치중하고자 했으나 척준경 만이 반대하며 적과 싸우고자 하였다. 윤관은 척준경의 용맹을 믿어, 그에게 결사대와 함께 적을 치도록하였다. 결사대를 이끌고 성밖으로 나간 척준경군은 바로 적군 19명의 목을 베었고, 여진족 선발대는 놀라서 북쪽으로 달아났다. 성벽 위 누대에서 본 윤관은 누대에서 내려와 이를 맞이하여 손을 잡고, 서로 절을 하였다.

 

이후 윤관, 오연총은 이에 제장들을 거느리고 중성대도독부로 모였다. 이때 권지승선 왕자지가 공험성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도독부로 오던 중 여진족 장수 사현의 군사들에게 갑작스러운 공격을 받아 위기에 처하자 척준경은 용맹과 기지로 여진족들을 패퇴시켜 왕자지를 구했다. 한편 왕자지가 말을 잃어버리자 직접 적진에 뛰어들어 여진족 병사 한명을 쓰러뜨리고, 말 한필을 뺏어와 왕자지에게 주기도 했다.

 

2월 우야속은 대군을 이끌고 웅주성으로 진격했다. 우야속 군이 웅주성을 포위하자 겁에 질린 고려군은 움직이지 못했으나 최홍정이 군사들을 타이르고 격려하니, 다시금 전의를 갖게 되었다. 4문을 열고 일제히 나가 공격하여 크게 이겼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적의 포위가 심해지자 성 안에 있던 척준경은 상황이 위급함을 전해듣고, 군사의 해진 옷을 입고 밤에 홀로 줄에 매달려 성을 내려가, 정주로 돌아가서 군사를 정돈한 뒤, 원군을 거느리고 통태진을 통과하여 야등포로부터 길주에 이르러 여진족들을 차례차례 격파하였다.

 

1108년 음력 8월과 9월에도 왕자지와 함께 싸워 전공을 세워, 8월엔 함주와 영주, 9월엔 사지령에서 여진족을 대파하여 총 수급 60개를 얻었고 3명을 포로로 잡았다. 하지만 이후 여진의 반격이 거세지고, 조정에서도 화친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커지자 1109년 철수하게 되었다.

​척준경은 여진족을 상대로 수많은 전공을 세움으로써 명성이 높아지고 수차례 승진을 거듭했다. 예종은 척준경의 전공을 치하하는 뜻에서 행영병마판관에 임명하고, 아버지 척위공을 궁궐로 불러들여 위로함과 동시에 척준경의 공을 치하하고, 술과 고기, 은 1덩이, 멥쌀 10석 등을 하사하였다.

 

 

- 척준경(소드마스터)

 

 

한편 1109위위시소경이 된 척준경은 여진족을 정벌할 때는 누구보다도 뛰어난 용맹을 떨쳤으나 전쟁이 끝난 후에는 여진족을 신중하게 대해야 한다는 입장을 가졌다.

  

1115년 음력 1월 요나라에 반기를 들었던 완안 아골타가 금나라를 세우고 황제라 칭하자, 요나라의 천조제 야율연희는 대군을 편성하여 여진족을 진압하려 했으나 요나라군은 금나라군에게 대패하였다. 그해 음력 8월 천조제는 다시 15만 대군을 편성하여 금나라를 공격하려 했는데, 이때 고려에도 사신을 보내어 금나라와의 싸움에 군사를 보내 달라 요청하였다. 대부분의 신하는 군사를 보낼 것을 주장했으나 척준경은 김부일·김부식 등과 함께 여진족 정벌 이후 국력이 회복되지 않았음을 이유로 반대하였다. 결국 출정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천조제는 금나라군과 싸워 또 한 번 처참한 패배를 당했다. 천조제는 음력 11월에도 사신을 보내 고려군의 출병을 요청했지만 고려군은 끝내 움직이지 않았다.

 

1123년 참지정사, 이부상서를 거쳐 1124년에는 중서시랑평장사에 임명됐다. 하지만 문신 관료들의 멸시와 무시 견제 등으로 1125년에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이에 인종은 최식과 이후를 보내 그를 달래어 돌아오도록 했고, 다시 중서시랑평장사가 되었다. 1126년 음력 3월 조정에서 금나라를 받드는 것에 대해 논의하자 대부분의 신하가 반대했으나, 척준경은 이자겸과 함께 금나라가 강대해졌으므로 섬기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였다. 이로 인해 고려와 금나라 사이에 군신관계가 맺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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