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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룡이 나르샤 : 황희, 이도(세종)

육룡이 나르샤 : 황희, 이도(세종)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 두문동 사건 때 황희가 첫 등장을 했다.

 

당시 황희는 정도전을 찾아가서

이방원을 용서할 수 없다며 힘을 갖추기 위해 관직을 달라고 하였다.

 

장수황씨 가문의 전승에 의하면

황희는 두문동에 들어갔지만 불에 타기 전에 나왔다는 기록()이 있지만 정확하지 않다.

일설에는 두문동에 은거하던 사대부들이

살아 나가서 백성들을 보살피는데 힘을 보태는 사람도 있어야 하니 황희에게 관직을 받으라고 밀어내듯 보내는 바람에 먼저 나왔다고 한다.

- SBS 육룡이 나르샤. 황희

  

황희는 태조부터 시작해 정종, 태종, 세종까지 네 명의 제왕을 보필한 인물이다.

정승 자리에는 24, 영의정 자리에 18년 동안이나 재직한 뒤 물러나는 비교적 평탄한 삶을 살았다.

 

하지만 실각하여 유배를 당하는 등의 시련도 충분히 경험하였다.

 

황희가 유배를 당한 이유는 양녕대군의 폐위와 충녕대군(세종)의 세자책봉을 크게 반대했기 때문이다.

명분은 양녕대군이 적자인데, 그를 내치고 다른 아들로 세자를 삼게 되면 후세에 큰 환란의 불씨가 된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가까운 파주 교하에 유배되었고, 다른 이들이 죄를 주어야 한다고 거듭 주장하자, 그의 조상 고향인 남원으로 유배지를 바꾸었다.

이 역시, 어머니를 모시고 유배생활을 하라는 태종의 배려였다.

황희는 남원 유배지에서 3년을 보내는 동안 문을 걸어 잠그고 친구들도 만나지 않은 채 글 읽기에만 열중했다.

 

또 파직된 것은 좌의정으로 있을 때, 그의 지인 태석균(太石鈞)이 대수롭지 않은 일로 투옥되었을 때였다. 그는 사헌부에 태석균의 감형을 부탁했다는 죄목으로 잠시 파직되었다.

황희의 성품은 너그럽고 어질며 침착하였다.

또한 사리가 깊고 청렴하며, 충심, 효심이 지극하였다. 그래서 자신이 모셨던 모든 왕들에게 높은 신임을 받았다.

  

세종(이도) 역시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세자책봉을 크게 반대했던 황희를 왕위에 오른 지 3년 뒤인 1422년 좌참찬으로 임명하였다. 그 후로 두 사람은 공적으로는 군신의 관계였지만 사적으로는 둘도 없는 친구의 관계였다.

 

- SBS 육룡이 나르샤. 황희

 

- 참고문헌 : '황희' 이이화의 인물한국사

 

관련 영상 : [선공개] 이방원, 아들 이도에게 느끼는 정도전의 모습 '경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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